성희롱·추행 등 성비위 징계 대상자의 의심 정황이 이미 구체적으로 특정돼 징계 대상자가 징계 사유나 피해자를 안다고 볼 수 있다면, 징계 관련 서류에서 피해자의 실명 등 인적사항이 지워져 있더라도 가해자의 방어권이 침해된 것은 아니라는 대법원의 첫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이동원 대법관)는 전직 검찰 수사관 A씨가 "해임 처분을 취소해달라"며 검찰총장을 상대로 낸 소송 상고심에서 A씨의 손을 들어준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7일 밝혔다.

A씨는 2018년 2∼10월 여성 사무원·수사관, 후배 수사관들을 상대로 성희롱과 언어폭력을 일삼고, 우월적 지위를 남용한 부당 행위 등을 했다는 이유로 대검찰청 징계위원회를 통해 해임 처분됐다.

1심은 A씨의 해임 불복 소송을 기각했지만, 2심은 해임 처분에 절차적 하자가 있었다는 판단을 내렸다.

징계 처분부터 소송이 시작된 뒤까지 피해자가 누구인지 등이 특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A씨로서는 피해자 진술을 반박할 기회가 사라져 방어권이 침해됐다고 본 것이다. 실제로 검찰이 법원에 낸 징계 서류에는 피해자들 이름이 지워져 있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A씨의 방어권에는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며 2심 판결을 파기했다.

A씨는 해임 처분 과정에서 진술 기회를 받아 이미 특정된 혐의사실에 관해 구체적인 의견을 밝히는 등 피해자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고 대법원은 지적했다.

그는 애초 징계 처분과 소청심사, 1심 소송 단계까지는 방어권 침해 주장을 하지도 않았고, 2심에서는 오히려 "피해자로 등장하는 동료들이 누군지 알고 있고 적극적으로 사죄했다"는 내용의 준비 서면을 내기도 했다.

이런 사실관계를 토대로 대법원은 검찰이 징계와 관련된 서류에 피해자들의 신원을 기재하지 않은 것은 2차 피해를 막기 위한 것으로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성비위행위의 경우 징계 대상자의 방어권 보장을 위해 일시, 장소, 상대방, 행위 유형과 구체적 상황이 특정돼야 함이 원칙"이라면서도 "혐의사실이 특정돼 징계 대상자가 사유의 구체적인 내용과 피해자를 충분히 알 수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피해자 실명 등 구체적인 인적사항이 공개되지 않는다고 해도 방어권 행사에 실질적인 지장이 초래된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어 "특히 성희롱 피해자는 2차 피해 등의 우려가 있어 실명 등 구체적 인적사항 공개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고 덧붙였다.

'피해자 보호'와 '징계 대상자의 방어권'이 충돌하는 가운데 방어권 행사가 실질적으로 지장을 받았는지를 판단할 때는 2차 피해 방지를 위해 통상적인 경우보다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는 취지다.

대법원 관계자는 "향후 하급심의 동종 유사 사건에서 이 판결이 하나의 판단 기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설명했다.